예수님의 비유
1, 씨뿌리는 비유
(마태복음 13장 36-43절)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심판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동안에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마귀를 선택했다. 마귀의 질문에 반응하고 답하므로 마귀의 말을 쫒아갔다. 하나님의 사랑 만을 생각한다면 구원에서 멀어진다. 그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은 예표가 솔로몬이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여디디아』라고 이름을 주셨다. 그 말의 뜻은『사랑받는 자』라는 말이다.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하나님으로 부터 지혜를 물려받았다. 그는 아담처럼 모든 것을 다 받은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어버렸고,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다.
탕자는 솔로몬처럼 사랑의 아버지 집과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 마치 아담처럼 그렇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노아가 전한 것이다. 노아가 전한 것이 바로『의의 도』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사랑의 도』가 아니라『의의 도』다. 의가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다 소경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말하기를『백성들에게 말하라, 올라오는 자는 다 죽으리라』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소리와 흑암으로 나타나는 구름을 들으면서 모세에게 말했다.『우리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싶지 않소이다. 당신이 듣고서 우리에게 말해주시요』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했다.『저들은 올라오리라 그들은 돌파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충돌할 것이다』올라오지 말라고 해도 그들은 올라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스스로『무서워서 올라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간은 자신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게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의 상태였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기 전에 교회를 평생다녀도 모두가 소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소경이 되면 옛사람인 것이다.『십자가 앞에서는 다 나를 버리리라』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이마나 손에 표를 새기지 않으면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에게 절하지 않으면 다 죽인다고 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는 다 표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않는 자는 다 표를 받게 된다. 회개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 만이 생명책에 기록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야 구원받는다. 열처녀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등불을 켜고 안 켜고가 아니라, 주님이 그들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회개한 자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는 자 만이 구원받는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인을 뗄 때마다 온 땅을 심판하신다. 일곱 교회에도『잘못하면 토하여 내 친다』고 말씀했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 복음이 선포되면 심판이 함께한다. 그 복음을 받아드리는 자에게만 구원이지만 그 복음을 받지 않는 자는 심판인 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회개하라는 것이다. 자기부인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인이 떼어지고 대접이 열려 하나님이 심판을 하는 동안에도『저들이 회개치 아니하니라』라고 했다. 죄악된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어도 회개하지 않는다. 노아 때도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쫒아낸 일이 있었다. 동네 거라사에서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귀신들이 말하기를『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히기 위하여 이렇게 하시는거냐』고 말하면서『무저갱으로 가지 않게 해 주소서, 저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귀신도 주님께 기도하고, 허락을 받는다. 주님이 주관자 이심을 알고 있다. 그래서 수천마리의 돼지 때가 갈릴리 바닷물로 달려가서 떼죽음을 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예수가 떠나가도록』요청했던 것이다. 인간은 귀신이 나가는 역사가 일어나도 회개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어도, 귀신이 떠나가도, 인간은 그것 때문에 회개하지는 않는다. 복음이 선포될 때 유일한 회개의 기회를 잡는다.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온다. 복음은 구원의 말씀이지만 심판의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구원의 복음으로 마음의 위로를 받을 것이 아니라 심판의 복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복음이 선포될 때 구원과 심판은 동시에 다가온다. 구원과 심판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다.
로마서 3장 9절에서『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사람들은 사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죄 아래 있어서 심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다. 인간들이 보기에 선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심판받아야 할 존재다. 선은 하나님의 판단 기준에서 나오는 선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3장 10-12절에서『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그리고 13-17절에서는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2. 혼인잔치의 비유
마태복음 22장 1-14절『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에서 어떤 임금은 하나님이시다.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혼인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자기의 신부를 데려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는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지칭한다. 교회는 바로 성도이며, 영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육체 속에 갇히므로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신부 삼아서 다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 혼인잔치를 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마지막 말씀이다. 동생에 대해서 큰 아들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회개의 말이 없다. 아버지의 사랑만이 언급된다. 이 말씀은 사랑의 하나님을 설명하는 예화로서 유명한 말씀이다. 영접 기도처럼 탕자의 비유가 많이 언급되어진다.
유대인의 결혼식은 일주일 정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오는데, 신부의 친구들이 함께 기다린다. 결혼식을 한 후 신부집에서 아들을 낳은 후에 신랑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오시면, 성도는 그의 아내가 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에서 어떤 임금은 하나님이시다.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혼인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자기의 신부를 데려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는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지칭한다. 교회는 바로 성도이며, 영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육체 속에 갇히므로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신부 삼아서 다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 혼인잔치를 하는 것이다.
혼인잔치는 세상 끝날에, 천하만민 중에 그리스도의 신부된 자들만 들어간다. 세상 끝날 날은 범죄한 영들이 아담 안으로 마지막까지 들어오는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하나가 되는 것처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이듯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먼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왜 택하셨는가를 잘 이해해야만 한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천하만민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은 천하만민의 모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시고, 복을 약속하셨는데, 그 복은 천하만민이 구원을 받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세상 사람들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의를 주신다고 했는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실패를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천하만민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배우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처럼 되지 말고,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초청장은 율법과 같은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떠난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와 같다고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말한다. 율법은 그 속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오라는 초청장인 것이다. 이 초청장이 천하만민에게 보내지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다. 초청장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이다. 21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방인이 먼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22장에서 혼인잔치 비유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청함을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온전히 통치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는 성령이 없으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율법을 통해서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라고 하는데, 그들은 이 땅이 좋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려면 육적인 몸을 벗고, 영의 몸을 입어야 하는데, 그들의 눈으로는 영의 몸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육으로 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영의 몸이 의의 옷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몸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속 종들(선지자)을 보냈으나, 이스라엘은 많은 선지자를 죽였다. 심지어 아들까지 죽였다. 이사야 49장 6절에서 『그가 이르시되 네(그리스도)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그리스도)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종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초청장)을 보냈지만,『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홀히 하여 알 수 없게 된 것이다.『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으로』의『자기』라는 말이다.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자기가 주인 사람은 육체 속에 죽어있는 영을 발견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율법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자기』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자기라는 존재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악(탐욕)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를 버리라고 말하는데, 비유에서 초청받은 사람들은 자기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밭을 샀기 때문에, 소를 다섯겨리(25마리)를 샀기 때문에,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의 모습은 이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이 세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율법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떠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로 가지 않은 것이다. 초청장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한 유대인들의 지도자급인 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었다.『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이스라엘은 A.D.80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이유에 대해서 사도행전 13장 46절에서 설명하고 있다.『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사도행전 28장 28절에서도『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사도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먼저 전해지는 것을 신비 라고 말한다. 로마서 11장 25절에서『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초청장이 천하만민에게로 갔다.『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네거리는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있는 경계를 말한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서 권능받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여기서 악한 자와 선한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렇게 불려지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 모든 자들이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임금이 그 사람을 발견하고 잔치 집에서 내 쫒았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누구인가? 예복은 자기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예복이 혼인잔치 집에 준비되어 있는데,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혼인잔치 집을 채운 사람들은 이방인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한 자들이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지 않은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기 위해서는 자기의 옷을 벗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의의 예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의 옷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옛사람이 죽지 않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자들이다. 자기의 힘으로 의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예복은 내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옷을 벗고, 준비된 예복을 입으면 되는 것이다.
3.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장 25-32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탕자의 비유를 하게 된 이유는 누가복음 15장 1절에서『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세리와 죄인들은 모든 사람들로 부터 정죄받는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께 나아온 것이다. 그리고 15장 2절에서『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예수님을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므로 예수님이 3-4절의 말씀을 하게된다.『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찾으면 이웃과 친구를 불러 잔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7절에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 보다 더하리라』여기에는 회개에 대해서 언급된다.
그 다음에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비유가 8-10절에서 나오는데 밖에서 잃은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찾았더니『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라고 한다. 여기에도 회개가 언급된다.
회개가 무엇인가? 오늘날 회개의 의미가 repent에서 receive로 바뀐 것이다. 돌이키는 것에서 영접으로 바뀌었다. 위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살펴보면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다는 비유이다. 구원은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주님이 아들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두번째 드라크마의 비유에서 드라크마는 죽어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다 영으로는 죽어있다는 말이다. 2장 2절에서『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허물과 죄로 죽은 이유가 바로 세상 풍속을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죽어있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고 있다 할지라도 세상을 따르고 있다면 주인은 마귀인 것이다. 에베소서 2장 3절에는『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사랑의 자녀가 아니라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언급하므로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탕자의 비유는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에서 죽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자가 살아 돌아오는 자를 사랑한다는 말씀이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는 자는 거듭난 자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실로암 망대에서 망대가 갑자기 무너져서 그 곳을 지나가던 자가 열명이 넘게 죽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오늘날에도 공사장을 지나가다가 억울하게 죽는 자들이 많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실로암 망대 때문에 죽은 자들이 참 애석하다』고 말하니까『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저렇게 죽으리라』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온전해지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자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자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하나님의 의가 있는 자이다. 따라서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가 필요한 것이다. 의가 없는 자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7-18절에서 말씀하고 있다.『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그리고 로마서 2장 5절에는『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이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그의 아버지가 마귀이고 죄인들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진노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다. 의의 하나님을 전하지 않고 사랑의 하나님만 전하는 자는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는 사단이다. 주님이 불로 멸하실 것이다.
지금은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람의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여, 하나님의 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육신적 자아가 죽어야만 한다는 회개가 있는 자는 찾기가 쉽지않다.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의 죽음과 연합되는 자는 극히 드물다는 말이다. 주님이 주인되는 삶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되는 삶을 사는 거짓된 교인들이 득실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는데,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 만을 노래하고 있는 실정이다. 흰옷인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자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시겠다고 계시록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롯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롯의 처는 부패했기 때문에 가면서 뒤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말씀이다.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끝까지 바라보는 자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회개를 외치는 자만이 가능할 것이다. 노아가 의의 도를 외치는 것 처럼, 의의 도를 외치는 자만이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4. 열처녀의 비유
(마태복음 25장 1-13절)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유대인의 결혼식은 일주일 정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오는데, 신부의 친구들이 함께 기다린다. 결혼식을 한 후 신부집에서 아들을 낳은 후에 신랑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오시면, 성도는 그의 아내가 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천국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지 못한 자를 상징한다. 열처녀는 모두 다 졸았다.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고, 열심히 안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졸지말고 깨어 있으라』는 말은 교회의 일에 『게으르지 말라』라는 말이 아닌 것이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신랑이 온다는 소식에 잠을 깨니, 기름이 없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기름을 꾸어달라』고 하니『기름이 모자란다』고 주지않고,『파는 사람에게 가서 사라』라고 했다. 그래서 사러 갔다 와보니 문이 닫힌 것이다.
미련한 다섯처녀가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기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어있으라고 말을 한다. 기름과 깨어있는 것은 연결된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는 말은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 부활된 자가 기름을 가지게 된다. 기름은 등잔대에 있는 올리브 기인데, 성령을 상징한다. 살아있을 때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성령의 기름이 없는 것이다.
이사야 61장 1절에서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요한1서 2장 20절에서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한1서 4장 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한1서 2장 27절에서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슬기로운 처녀가 미련한 처녀에게 파는 자에게 기름을 사오라 했다. 기름을 파는 곳은 성전을 의미한다.성전에서 어떻게 기름을 사올 수 있는가? 예루살렘 성전은 율법을 의미한다.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자만 기름을 사올 수 있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가 기름(성령)을 값없이 사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깨어있는 자(부활한 자)만 기름을 사올 수 있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이런 장사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의 성령이 성도에게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잠을 자는 자인 것이다.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한다. 현재 살아있을 때 부활을 이루라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을 믿어야만 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잇다. 하나님 나라는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성령이 임하셔서 성도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5. 므나의 비유
(누가복음 19장 11-27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와 흡사하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다. 교회 사람들은 전도를 잘하면 하나님이 상급을 내리신다 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셨으며, 다시 재림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행동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이 비유는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를 분명하게 나타내 보인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다 알게오신다. 도적같이 오시는 예수님과 온 족속이 다 알게오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도적같이 오시는 예수님은 휴거를 당하는 자를 말하고, 모든 족속이 보는 상황에서 오시는 것은 7년 대환란 후에 오시는 지상재림인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때 나타날 현상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징조가 나타날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멸망했지만 거의 2000년이 지나서 이스라엘이 독립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므로 바리새인들이 이를 지적하고 나섰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다.『한 부자가 있어』부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부자를 말할 때, 세상의 부자라는 말이 아니라,『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의 의를 지키려고 하는 자』를 지칭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서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이다.『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와 흡사하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다. 교회 사람들은 전도를 잘하면 하나님이 상급을 내리신다 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셨으며, 다시 재림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행동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이 비유는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를 분명하게 나타내 보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 하실 때에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율법을 이루셨는데, 세상에 남겨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인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의 말씀을 떡으로 표현했다. 요한복음 6장 48-51절에서『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이 말씀은 율법을 성취하시고 이루어진 것이다.
달란트(헬라어)는 히브리어로『키카르』라고 하는데, 성소의 진설병의 하나였다. 즉 율법을 나타낸다. 신명기 18장 22절에서『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장래 하나님이 세우는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신 일이 증험도 있고 성취함도 있는지를 보는 것이 바로 달란트 비유와 므나의 비유인 것이다.
『장사하다』라는 헬라어로『엘가죠마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 다음날 또 유대인들이 찾아왔다. 예수님이『너희들이 나를 찾은 이유는 표적을 본 것 때문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일을 한다』는 것이『엘가죠마이』다. 히브리어로 『아바드』라고 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경작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경작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을 한다. 영적으로는 마음 밭을 갈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열매가 하늘의 생명이다.『엘가죠마이』라는『일을 한다』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즉 『장사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달란트로 장사했다는 말은 앞의 과정을 거쳐 얻어진 떡을 통해서 영생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다. 다섯은 율법을 말한다. 다섯 달란트(율법)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 그래서 열 달란트가 되었다. 열 달란트는 율법의 완성을 의미한다. 율법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떡과 포도주를 남겨신 것이다. 달라트 비유는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다. 달란트를 남긴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성취한 자들이다. 두 달란트는 산 떡이 두개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두개의 달란트를 벌었다. 산떡 두개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두개는 초림의 예수와 재림의 예수를 나타낸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떡 하나를 받아서 땅에 묻었다. 누구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마태복음 23장 13-15절에서『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땅에 묻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땅에 맞추어서 하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말한다.
므나의 비유도 달란트와 거의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므나의 비유는 므나(산떡)를 열 사람에게 주었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리고『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한다. 열이라는 말은 온 세상을 말한다. 여기서 『장사한다』는 말은 달란트의 비유에서 말하는『엘가죠마이』와 다르다. 헬라어『프라그마 듀오마이』라는 말로서 이 말은『프라스오』에서 온 말이다. 『행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그 몸으로 행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서 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서 의로운 자가 되라는 것이다. 므나로 장사하는 것은 의로운 자가 되는 의미를 갖는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열 므나는 말씀이 완성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의 살과 피로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고을은 성읍을 말한다. 예루살렘 성을 말한다. 예루살렘 성은 참 성전(새 예루살렘 성)의 그림자다. 열 고을은 새 예루살렘 성을 말한다. 권세는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를 말한다. 마태복음 9장 6-8절에서『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그리고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이 권세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는 것이다. 이 권세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살과 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다섯 므나를 받은 사람도 한 므나를 가지고 다섯므나를 남겼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인이『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이 말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다섯 고을을 만들어라』는 말이다. 그래서 열 므나가 되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다섯 므나 밖에 못만들었으니 다섯 므나가 더 필요한 것이다.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의미한다.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서 감추었다』는 것은 자기도 의에 이르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의에 이르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기도 율법 아래 있으면서, 다른 사람도 율법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여기서 은행(헬라어:트라페자)이라는 말은 헬라어로『테이블』(상)이라는 말이다. 진설병 상(떡 상)을 말한다. 히브리서 9장 2절에서『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출애굽기 25장 30절에서도『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예수 그리스도라는 산떡을 왜 떡 상에 올리지 않았는냐 라는 것이다. 떡 상에 올려 놓으면 누구라도 먹고, 생명을 얻게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생명의 떡을 먹게 되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이자)하게 된다는 것이다. 떡을 감추어 둔 자(바리새인들)의 죄는 큰 것이다.
6.무화과 나무의 비유
(마태복음 24장 29-35절)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있다. 누가복음 13장 6-9절에서『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한 사람은 하나님이시다. 포도원은 이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열매를 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열매가 없으므로 찍혀버렸다.
마태복음 21장 9절에서『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찬가지로 마가복음 11장 13절에서도『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무화과의 때가 아니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1장 9절에서 길가의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하신 말씀이『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영원토록』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이스라엘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저주하신 대상은 무화과 나무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기대하신 열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으며,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서, 도저히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발견하라고 하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못박아 버렸다. 하나님은율법 속에 있는 이스라엘이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바라신 것이다.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된 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부르짖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했다. 이스라엘의 대표격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부르짖지 않고, 세리, 창기, 병자들은 부르짖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여기서『가지가 연하여지고』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이스라엘의 독립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때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그 상황을 노아의 때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멸망시켜버렸다. 그 이유는 창세기 6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창세기 6장 2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그리고 창세기 6장 5절에서『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당시의 세상 사람들의 영적 간음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모두가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오늘날 동성애가 만연하고, 동성결혼을 범 세계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때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점차 가까워오고 있는 상황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점차 마지막 때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성경의 번역도 진행되고 있다. 동성애는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인공지능의 연구와 개발이 날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사람의 몸에 컴퓨터와 연결을 시도하고 있으며, 기억을 복제하여, 저장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동물의 복제 기술이 인간에게 적용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은 글로벌 상태로 통합되고 있으며, 전쟁에 쓰이는 무기의 파괴력은 너무나 심각하며, 돈은 현금에서 신용거래로 정착되고 있으며, 전자결재 시스템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666이라는 말이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듯 싶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메시야 왕국(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셨다. 성경에서는 이를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메시야 왕국은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천하만민에 대해서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지만, 사람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은 실패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예수님이 직접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천년왕국(메시야 왕국)이다.
7. 잃어버린 양의 비유
누가복음 15장 1-7절『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신 배경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만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의인들인데, 메시야가 오면 당연히 자기들에게 올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메시야라고 하는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식사를 하므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는 숨겨진 뜻이 있다. 듣고 깨닫는 자만이 알게된다.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11-13절에서 씨뿌리는 비유가 있다.『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서 55장 1절에서『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목마르고, 돈 없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구한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영이 가난한 것을 아는 자다. 영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깨닫고 영을 살리는 생명을 달라고 하면 주시는 것이다.
영을 살리는 생명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회개하여, 하나님께 구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주신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양 일백 마리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열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충만한 것을 나타낸다. 일백은 열의 열이다. 즉 더욱 더 충만하다는 것이다. 양 일백 마리는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더 넓게는 천하만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양 일백 마리는 이스라엘을 염두에 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에서『잃다』라는 말의 원어는『죽다, 파괴된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잔치를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큰 아들이 여기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32절에서『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라고 말했다. 여기에서『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여기에서 잃었다는 말이 죽었다는 의미로 대체된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 곧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 들어있다.『죽은 것과 잃은 것』의 의미는 영이 죽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떠나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죄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죽었으며, 잃어버린 것이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이 의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너희는 자칭 의인이라고 하므로 의원이 필요없다』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 39-41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맹인은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들이며,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소경인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내용은『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하고, 보는 자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세리나 죄인들이다. 보는 자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자칭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보게 한다는 것이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바리새인들이 자칭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하므로, 사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죄인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의 눈을 감겨버리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돌이킨다는 것이다.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지은 죄로 인하여 회개를 생각하고 있지만, 회개의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 나라를 떠난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이며 그래서 돌이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탐욕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이 회개다. 탐욕을 포기하는 것은 육체 속에 숨겨진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육의 탐욕은 자기라는 주체로 나타난다.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탐욕의 뒤에는 사탄이 뱀처럼 숨어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회개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기쁘게 맞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버리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이와같이 회개한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떠난 양이다. 그런데,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 양이 한 일은 목자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 양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이 목자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다. 양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순순히 목자를 따라 가는 것이다.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을 말한다. 목자를 떠난 양이 죄인이다. 양이 목자를 만나면, 돌아갈 수 있다. 양이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바로 회개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예수님이 다시 설명하시는데, 바로 삭개오의 이야기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통하여,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혼아홉 마리의 양은 자기의 의를 내세워 자칭 의인이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말한다.
8.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누가복음 16장 19-31절『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옳다 하고, 높힘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켜서 행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이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고 한다. 출애굽기 28장 4절에서 보면 제사장 옷은『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라고 되어 있는데, 28장 8절에서『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에봇에 정교하게 붙여 짤지며』라고 되어 있다. 제사장의 거룩한 옷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자색실은 역대하 3장 14절에서 표현되어 있듯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에도 들어갔다. 여기에 들어가는 색의 실은 거룩을 나타낸다. 부자가 자색옷을 입었다는 것은 스스로 거룩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고운 베옷은 흰 세마포를 말한다. 역대하 5장 12절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날마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이다.『호화롭게 즐기더라』호화롭다 라고 번역된 이 단어에는『깨끗하다(죄가 없다), 열락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생각할 때 항상 율법을 잘 지키고 살았으므로 깨끗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는 다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항상 죄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고, 즐거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거지는 가난의 대명사다. 가난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난한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났으므로 이것을 깨달을 때 영이 그렇다는 것이다. 거지는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하나님께 대하여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그런 자라는 것이다.『나사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나자로스인데, 히브리어는 엘 아사르라 부른다. 엘은 하나님이고, 아사르는 도움을 얻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의미다.
나사로는 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의 어떤 행위를 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고 구원하신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9장 8-9절에서『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갈라디아서 3장 6-7절에서『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아브라함의 믿음은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서『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나사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했다고 말씀하셨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를 떠난 것이 탕자다. 회개는 죽은 자같이 되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다. 즉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 라고 생각했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들이라고 고백하며 긍휼을 구했다. 세리와 죄인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 자체가 죄의 상태에 묶여 있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님은『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나 세상 가운데 처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우리를 찾아오신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좋은 것을 받았다는 것은 자기의 의로 사람들에게 좋아할만한 칭찬을 받았다. 누가복음 16장 15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그래서 부자는 음부에 가는 것이다.『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고난은『나쁜, 사악한, 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사로는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임을 받아드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설 때,『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눈먼자, 손마른자, 문둥문둥병자 고쳐주실 때, 그런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기대하고 있었던 믿음은 백부장이 같은 믿음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부자가 음부에 가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했다. 나사로를 살려서 세상에 나가면, 형제들이 회개할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그리스도의 약속)을 들으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부자는 아니라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부자가 율법 속에 담겨져 있는 것(그리스도)을 깨닫지 못하고,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율법 속에서 발견하라는 것이다.
9. 겨자씨의 비유
(누가복음 17장 1-6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형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말한다. 그런데, 그 형제가 실족하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거듭난 형제도 육체가 있으므로 연약하여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을 수 있으나, 용서하고 주님의 뜻 안에서 거듭난 자로서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데, 형제가 내게 죄를 범했는데, 몇 번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일곱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는지 물었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를 해 주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무한정 용서를 해 주라는 말씀이다. 용서를 무한정 해 주어야 되는지 설명하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 18장 23-35절의 말씀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이 1 만 탈란트 빚진 자요, 형제는 100 데나리온 빚진 자라는 말이다. 1 만 탈란트와 100 데나리온은 비교가 안된다는 말이다. 1 만 달란트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10억 달라 정도의 가지가 있는데, 100 데나리온은 노동자 3개월 정도의 월급(수천불 정도)에 해당된다. 십억 달러와 수천 달러의 비교이다. 따라서 사람에 대해서는 무조건 용서를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볼 때, 나는 이미『하나님으로 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죄 문제는 해결이 된 것이다. 이제 탕감 받은 후에 100 데나리온의 문제, 즉『남을 용서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만일 1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1 만 달란트 빚의 탕감은 취소가 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그 용서를『무효화 한다』는 말씀이지만, 이후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과거에 하나님이 죄를 탕감해 주었던 원래의 위치대로 회복시키겠다는 말이다.
형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말한다.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으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영이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다시 죽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용서의 대표적인 이야기가 요셉의 이야기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다. 우리가 미움과 질투를 받으면 저주가 발생한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 열명이 요셉을 죽이려하다가 돈을 받고 팔았던 것이다. 이게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판 것과 같다. 그리고 요셉은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도 누구엔가 미움을 받으면 인생이 갇히는 수가 있다. 인생이 오도가도 못할 때 인생이 갇힌 것이다. 요셉은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보디발 아내의 거짓말에 의해 또 갇힌다. 이번에는 감옥에 갇혔다. 꼼짝 못하는 감옥에서 하나님 말씀이 임하시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용서라는 말이다.『팔아버린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용서할 대상을 주실 때는『가장 비참한 때』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배신당해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가장 비참한 때에 온 인류를 용서하신 것이다. 용서를 하면 부활의 역사가 시작된다.
예수님이 죄에 대한 예화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죄를 사함받는 우리에게도 주님이 우리가 용서해야 할 사람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10. 떡 세덩이의 비유
누가복음 11장 5-8절에서『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고』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 들어줄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 외에 기도하는 것은 효력이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내용이지만, 인간들의 기도내용은 대부분 이 세상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교회 사람들 중에 이 세상의 것을 위해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고 자랑한다. 누가 그 사람에게 주었는가?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사탄인가? 하나님께서는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 외에는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기도해야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누가복음 18장 1절에서『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라고 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를 하셨다.『낙심하지 말고』이 말에 대해서 영어성경은 kjv는『not to faint』, niv는『not give up』으로 되어있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을 기도하라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제자 중에서 예수님께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서 요청하자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말씀하시고, 바로 누가복음 11장 5절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여기서 밤중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없는 곳이 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빛으로 세상에 오셨지만,『누군가의 벗』은 예수님이 없는 자를 말한다. 누군가의 벗이 여행중에 자기 집에 왔는데, 그 친구에게 먹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또 다른 벗에게 떡 세덩이를 빌리려고 하는 것이다. 여행이라는 말은 나그네를 의미한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자가 나그네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나그네)가 누군가에게 찾아왔다는 말씀이다. 찾아왔으므로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야 하는데, 먹을 것이 없으므로 다른 벗에게 떡 세덩이를 꾸어달라는 것이다.『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이 말은 누군가가 생명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을 가진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누군가가 다른 벗에게『떡 세덩이를 꾸어달라』고 했는데, 다른 벗은 바로 예수님을 의미한다. 떡 세덩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구약시대 성전 안에 진설병이 있었다. 세덩이에서 삼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다.『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누군가에게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간청함』때문에 떡을 꾸어준다는 것이다. 『간청함』이 어떤 것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나왔다. 모세가 돌판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갔지만, 40일이 지나도 오지 않으므로 백성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출애굽기 32장 9-10절에서『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모세가 다급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출애굽기 32장 11-14절에서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모세가『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간청한 것이다. 간청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근거로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간청이 바로 이런 것이다. 누군가의 벗이 하나님을 벗어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이지만, 누군가가 다른 벗(예수님)에게 간청하여, 제발 떡을 꾸어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하늘의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누군가(중보자)가 간절히 간청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떡을 주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나그네다. 하나님으로 부터 벗어나, 흙에 갇힌 영들이 인간이 된 것이다. 레위기 25장 23절에서『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인간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13-16절에서『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떡 세덩이는 바로 우리는 나그네요,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생명의 말씀이다. 마태복음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다. 산은 예루살렘 성이 있는 시온산, 즉 이스라엘을 의미하고, 아혼아홉 마리의 양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런데 잃어버린 양 한마리는 바로 이방인,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목자이신 예수님이 이방인을 행해서 나가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방인들에게 나가는 것이다. 누구든지 떡 새덩이(생명의 말씀)를 꾸어달라고 간청하면, 예수님은 반드시 주실 것이다. 누가복음 11장 5-8절에서 떡 세덩이에 대한 비유를 마치시고, 11장 9-13절에서『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떡 세덩이를 간청하여 구하면, 반드시 줄 뿐만 아니라 성령까지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생명의 말씀을 간절히 구하여,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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